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러시아 혁명 (문단 편집) === 혁명 이전(1870 ~ 1900) === [[19세기]] 중엽 이후 러시아의 [[자본주의]]는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1860년대부터 1900년까지 [[공업]] 생산량은 7배 이상 증가했는데 특히 대규모 공장제 공업과 [[중공업]] 분야에서 꽤 두드러진 발전을 보였다. 그 결과 러시아는 [[광물]] 채굴, [[철강]] 생산, [[운송]], [[제조]] 등의 면에서 결코 [[서유럽]]에 뒤지지 않는 수준까지 도달하는 데 기어이 성공했다. 도시 노동자 수도 더불어 증가해 [[1865년]]에는 70만 명이었으나 1870년대 말에는 100만 명, 20세기 초에는 200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과 상관없이 그들의 삶은 계속 비참하기만 할 뿐이었는데 최저 임금도 없었고 무엇보다 노동시간 제한도 없었기 때문이다. 또 지각 등의 사소한 규정 위반에도 임금의 1/3 이상이 벌금이라는 명목으로 차감되었다. 여자 [[노동자]]는 출산 후 바로 다음 날 예외 없이 출근하여야 했다. 이에 대해 항의라도 하면 가차없이 해고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권리와 인권을 지키기 위해 단체를 결성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에 따라 1870년대 후반 [[오데사]]와 [[키이우|키예프]]의 남부동맹,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북부동맹 등의 정치조직이 연달아 탄생하였다. 이에 발맞추어 1870년대부터 [[파업]]이 시작되어 곧 번졌으며 이는 더욱 과격해져 마침내 1885년 주에보에서 섬유노동자의 주도하에 1만 명 이상이 참여한 파업 사태가 터졌다. 이는 당시까지 일어난 파업 중에서 최대 규모였다. 처음에 정부는 이러한 노동운동 자체를 무시했으나 결국 이에 굴복해 노동자 보호법이 마련되었고, 여자와 미성년자의 노동이 보호되고 노동시간도 다소 줄어드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부르주아들은 여전히 편법을 저지르고 있었고 이런저런 이유로 작업과 임금 상황도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 당연히 러시아 노동자들의 불만은 늘어날 수 밖에 없었고 러시아를 통치하던 [[로마노프 왕조]]에 대한 불신도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갔다. 이러한 가혹한 노동환경은 훗날 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러시아가 공산화되는 가장 근본적인 밑바탕으로 작용하게 된다. 1840년대 러시아에 들어온 [[공산주의]]는 당시 위와 같은 상황에서 러시아 지식인에게 많은 관심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1869년]] [[미하일 바쿠닌]]이 [[공산당 선언]]을 [[러시아어]]로 번역하고 자본주의를 분석한 유용한 경제이론으로 공산주의가 소개되면서 이와 같은 관심은 더욱 증폭되었다. 또한 러시아가 산업화되면서 농촌에서의 혁명을 주창한 [[인민주의]][* '옵시나'라고 불리던 러시아 고유의 농촌 공동체를 중심으로 농민을 바탕으로 한 혁명을 주장하며 농촌 계몽을 위해 [[브나로드 운동(러시아)|브나로드 운동]]을 벌였지만 실패로 끝났다. [[1881년]]에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을 당한 사건도 이들이 저지른 일이었다.]에서 도시 노동자를 기반으로 하는 공산주의가 러시아 혁명가들에게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오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같은 관심을 반영하듯 [[1883년]] 게오르기 플레하노프(1856 ~ 1918)의 주도하에 [[제네바]]에서 러시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 조직 '노동자 해방단'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자본주의를 거쳐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이른바 '2단계 혁명론'을 주창하며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책을 [[러시아어]]로 번역, 보급하였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Georgi_Plekhanov.jpg|width=100%]] || || 노동자 해방단의 결성자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 러시아 국내에서는 [[1883년]] '블라고예프단'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결성된 것을 시작으로 [[1885년]] 노동자들의 주도로 '토치키스 그룹', [[1889년]]에는 '브루스네프단'이 조직되었다. 이들은 노동자들의 계몽을 돕는 한편 공산주의를 선전했다. 위와 같은 국내의 공산주의자들의 조직과 활동은 해외의 노동자 해방단과는 별개로 진행되었으나, 노동자 해방단이 번역한 공산주의 서적들과 출판물들이 러시아에 유입되면서 간접적인 유대관계를 맺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서적의 유입은 국내의 공산주의 운동을 더욱 활성화시켜 1890년대에 이르면 전 러시아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소규모 조직이 폭넓게 확산되면서 분열되었던 [[인민주의]]는 몰락하고 공산주의가 혁명의 이념으로 완전히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렇게 러시아 전역에 혁명을 위한 바탕이 마련되어갈 무렵, 전제정치를 펼치던 [[알렉산드르 3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니콜라이 2세]]가 제위를 물려받아 새로운 [[차르|황제]]로 즉위하였다. [[노동자]]와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은 그가 개혁을 실행하기를 원했지만 아버지처럼 꽉 막힌 전제군주였던 [[니콜라이 2세]]는 어떠한 변화도 원하지 않았고, 아버지를 따라 시대착오적인 반동정치를 계속 펼쳐 나갔다. [[1881년]]의 임시법을 계속 적용, 확대하여 언론과 사상의 자유를 전면적으로 통제하는 한편 교육에도 제한을 가했다. 이에 반발한 공산주의자들은 [[1895년]] '노동자계급 해방투쟁동맹'을 결성하고 이에 대항하는 제스쳐를 적극적으로 취했는데 이 조직에는 [[블라디미르 레닌]], 율리 마르토프(1873 ~ 1923)[* [[멘셰비키]]가 되어 레닌의 [[볼셰비키]]와 대립하게 된다.], 크룹스카야(레닌의 부인), 라첸코, 포트레소프 등 훗날 혁명을 이끌 지도자들이 핵심 멤버로 참가했다. 그러나 투쟁 동맹은 그해 12월 당국에 의해 해산되었고 [[블라디미르 레닌]]은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투옥된 후 1900년까지 수감 생활을 하게 된다. 한편 [[1898년]] [[3월]], [[민스크]]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창당되었는데 이들은 유형 중이던 레닌을 팜플렛 편집자로, 제네바의 플레하노프를 해외 대표로 임명하였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제1차 창당대회 직후 당국에 의해 해산되면서 사실상 창립선언만 한 채 괴멸되었지만 이 사건은 러시아의 혁명가들을 크게 고무시켰으며 노동자들 사이에서 공산주의의 영향력이 한층 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선언문 중 한 구절이다. >[[유럽]]의 동쪽으로 갈수록 부르주아지는 정치감각이 뒤떨어지고 나약해진다. 그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부과되는 문화적, 정치적 임무는 더욱 막중해진다. 러시아 노동자 계급은 정치적 자유의 획득이라는 임무를 그 굳은 어깨에 짊어지고 수행해야만 하며, 또 수행해낼 것이다.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위대한 역사적 사명을 실현하고, 그 어디에도 인간에 의한 착취가 남아 있지 않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이며, 그 첫 걸음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